07 김영진

2월 23 업데이트됨


섞는다는 것의 기쁨


김민정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섞일 수 없는 것들을 섞는다고 생각했다.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이라는 투의 흔한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접매체를 섞는 상상력은 특이할 게 없지만 그 결과물로써 보는 이에게 어떤 안식을 준다는 것은 흔히 겪는 일이 아니다. 나는 김민정의 작품으로부터 편안한 해방감을 얻는 것과 동시에 거기 살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럼>과 같은 영화에서 주인공이 아예 텔레비전 수상기에 머리를 콱 박고 들어가는 것처럼, 김민정이 설치한 움직이는 벽에 들어가 주체와 대상의 입장을 바꿔 버리고 싶었다. 누군가가 내가 거기서 움직이며 재롱떠는 것을 봐주는 상상을 하며 기분이 좋아졌다.


김민정의 작품에 미술사적으로 어떤 레퍼런스가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앞서 거론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와 비슷한 지향을 품고 있다고 보지도 않는다. 크로넨버그는 기계와 섞이는 인간의 동경을 지속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휴머니즘에 대한 과격한 재정의를 다뤘지만, 김민정의 작품에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묘한 추동력이 있다. 살아있는 것을 포착하려는 열망에서 나아가 우리가 의식적으로 죽여버린 사물에서 생명력을 감지하게 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김민정의 작품은 어린 시절 몸에 배어 있었으나 이제는 스스로 그 감각을 까맣게 잊어버린 애니미즘의 정서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길거리의 돌맹이에도 영혼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시절, 공간과 사물을 촉각적으로 대하는 공감각적 공명이 거기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우리가 구획을 치고 스스로 유폐에 들어간 일상적인 세계의 벽에서 우리가 숨쉴 수 있고 심지어 거기 들어가 섞일 수 있다는 상상을 물질적으로 재현한 그의 작품은 주체와 대상의 이분적 분리를 가상으로나마 일거에 무너뜨린다.


이런 상상력의 근저는 무엇일까를 음미하고 싶다는 적극적인 구애의 의지를 김민정의 작품은 불러일으킨다. 내가 본 그의 작품들은 벽, 씽크대, 사전 등과 일상적 주변 사물에 경계를 없애고 새로운 섞기 충동을 제안하고 있었다. 벽이 움직이고 줄었다 늘어났다 하면서 프로젝트에 투사된 영상이 제 마음대로 수축하는 듯한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그 늘어났다 줄었다 하는 움직임이 보는 사람을 껴안는 듯한 기분 좋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벽으로부터 이런 기분을 전해받는 것은 거꾸로 내가 사는 아파트와 주변 일상에 대한 전도된 감상을 하게 만든다. 저것들이 나를 가두고 차단하거나 아니면 무의미하게 죽은 사물로 존재하는 것에서 벗어나 저것들이 나에게 말을 늘 걸고 있다고 하면 어떤 기분일까, 를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대체로 죽어있는 사물이 나에게 지각될 때 그것은 초현실적인 공포의 경험으로 이어지기 쉽다. 벽이 말한다는 개념으로부터 잉태된 숱한 공포영화들이 그 점을 잘 알려준다. 대상이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주체에게 대등한 관계로 지각되거나 상호소통의 상대로 인식될 때 인간은 공포를 느낀다. 그건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너와 나의 분리를 전제로 우리의 문명은 성립한다. 말로는 일체를 꿈꾸지만 실제로는 너와 나의 분리가 전제되지 않고 일정한 수직적 위계가 부정될 때 우리는 불안하다. 미친 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을 부수고 다시 짓는 우리의 문명적 태도가 함축하는 것은 돈이 되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 곧 서로 배려하면서 끌어안고 상대의 존재를 지각하는 그런 공간을 만들어낼 의사가 없다는 것을 꾸준히 과시하고 있다.


김민정의 작품은 내게 그런 위계적이고 배제적 공간개념에 대한 부드러운 공격으로 보였다. 과시적이지 않게 그의 작업은 일상적 노동의 공간인 부엌 씽크대와 같은 곳을 비틀어 거기서 재미있게 놀 수도 있다는 흥을 부추긴다. 공간이 원래 존재하고 있던 목적을 고정적인 선입견으로부터 놓아주어 놀이하는 공간으로 바꾸기 위해 그는 매체를 섞는다. 조형적으로 공간을 설정한 다음 이미지를 투사하고 거기서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방식이지만 거기서 일정하게 되풀이되는 패턴도 무한변수가 가능할 듯한 암시를 준다. 그의 작품이 일차적으로 환기시키는 공간변형의 쾌감이 우리의 일상적 공간인식의 패턴에 자그마한 균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김민정은 자신의 예술적 무의식을 설명할 이유가 없지만 그의 작품을 보는 우리도 굳이 그걸 끄집어내어 해명하고 싶은 충동을 갖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적 삶의 형태에서 아주 빡빡하게 굳어진 너와 나, 대상과 주체, 벽과 또 다른 벽을 스멀거리며 타고 넘는 벌레들의 유희처럼 가볍게 횡단하는 부드러운 틈입의 욕망이 그의 작품에 넘실대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가장 큰 고통은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 때문에, 동의할 수 없는 질서에 순응하면서 일상을 영위한다는 무력감 때문에, 간혹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관한 수많은 처방적 말들이 넘쳐나고 있지만 그 말들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김민정의 작품에서 내가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면, 그건 기승전결의 이야기 체계로도, 원근법적 시각의 구도로도 접수될 수 없는 다른 삶의 가능성이 아주 자그마한 틈을 통해 묘사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은 우리의 거실 벽 틈에 자그마한 구멍을 내고 그 구멍에서 다른 세계로의 진입을 위한 다른 구멍을 또 내고, 작품은 거기서 멈추지만 제 2, 제 3의 구멍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어 종국에는 우리가 그 구멍의 틈에 빠져들어 수시로 넘나들면서 편안하게 숨 쉴수 있는 안식처같은 것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몰입이나 황홀과 같은 체험과는 또 다른 것, 다른 세계를 우리 주변의 공간 틈에서 찾아내어 그걸 공포스럽지 않게, 친구처럼 여길 수 있게 만들어준다.


어떤 사물과도 친구가 된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감각하는 좋은 방법이다. 착란의 세계로 종종 설정되는 그 배제된 상상력의 확인으로부터 우리가 또 다른 예술작품을 친구로 갖게 된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나는 김민정의 작품에서 고통의 재확언에 이르지 않고도, 우리가 사는 것을 경직되게 반성하지 않고서도, 다른 삶의 가능성을 들여다보는 기쁨을 얻는다.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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