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공간, 물질에서 정신으로>
최지나(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공간을 숨 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기계적 숨 쉼이 아닌 공간을 들이셔 본다는 것 말이다. 이런 깊은 호흡은 움츠려져 있는 우리의 모든 감각을 온전히 밖으로 열어놓는 시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금민정은 세계-내(內)-존재자와 소통하며 비가시적 대상들을 드러내는 작업을 한다. 그녀의 작업은 처음 마주한 공간을 찬찬히 더듬으며 시작한다. 공간 안에 구조와 흔적으로 남은 장소성을 찾고, 공간의 생성과 존재이유에 질문을 던지면서, 공간-장소의 질서와 역사를 탐구한다. 그리고 마주한 세계의 퍼즐을 맞추고 빛으로 조각한다. 빛으로 재현하는 그녀의 조각-공간은 건축-공간과 다른데, 세계안의 존재자를 상징적 어법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조각의 욕망과 가깝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녀는 조각을 추구하지만 물질적 오브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는 인류의 정신을 표현하고 상징화하기 위해 물질을 조형했던 조각의 기원과 닮아 있다. 금민정에게 조각은 물질-오브제라기보다는 정신성을 집약한 물질적-이미지인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공간과 장소와 사물에서 시간의 물질적 흔적을 쫓는다. 그리고 존재자의(과거/현재) 흔적, 즉 물질적-이미지를 탐구하면서 현재를 과거로 확장하고, 개인의 경험을 공동체의 역사와 연결한다. 이러한 과정은 물질에 갇힌 우리의 조각적 상상력을 해방하는 것까지 나아간다. 결국 금민정의 환영-공간은 정신적-조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공간을 다룬 작업을 하게 된 배경은 무언가요?
화이트 큐브 그 자체를 움직이고 싶었어요. 그 안에 숨 쉬는 어떤 존재감을 유동적으로 표현하려 시도했죠. 첫 작업이 <숨 쉬는 벽>이에요. 전시장 전체에 프로젝션해서 환영이지만 생명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이죠. 조각을 전공한 제게 이런 행위는 조각의 정의를 새롭게 확장하는 계기였죠. 물질에 갇힌 조각에서 벗어난 다른 차원의 조각을 하고 싶었거든요. 1990년대 후반 한국에선 인스톨레이션, 키네틱 아트가 유행했어요. 특히 움직이는 조각이요. 그걸 보면서 “저런 것이 움직이는 조각의 새로운 형식일까?”라는 의문이 들었죠. 차라리 “아무것도 없어도, 큰 벽에서 추상적이지만 어떤 존재감이 느껴지면 그 자체가 조각의 새로운 형식으로 부각되지 않을까?” 생각 했죠. 그래서 공간을 있는 그대로 이용 했어요. 전시장을 살펴보니 하얀 벽, 기둥, 창고 문이 있더라고요. 그 이미지를 사진 찍어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고 저의 숨소리에 맞추어 움직이도록 했어요. 짧은 애니메이션을 동일한 공간에 투사해서 반복 재생 하니까 마치 일루전을 통해 또 다른 공간을 만든 것 같더라고요. 움직이는 조각적 공간이죠. 거기서 오는 조각의 느낌이 출발 지점이었어요. 공간 전체가 움직이는 조각이 되고, 빛으로 이루어진 개념적 공간이 된 거죠.
# 조각을 확장하는 방법으로 영상을 하게 된 건가요?
공간 자체를 다루고자 했던 생각이 공간을 움직이고자 하는 충동으로 이어지면서 영상작업을 하게 된 거죠. 작가 노트에 “이 벽은 나에게 캔버스이고, 카메라와 영상은 붓이다. 벽화를 그리는 것과 같고,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기록 했었어요. 벽을 가득 채우다 보니까 압도적인 공간 전체가 작품이 되었죠. 영상만이 아니라 그 공간까지도 제 작업의 일부가 되더라고요. 공간은 물리적인 조각이고, 하나의 물질이고, 영상은 개념적이고, 시간성을 내포하는 덩어리인거죠. 이 두 가지가 만나서 정신적인 공간을 생산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 작품은 미디어 파사드와는 확연히 달라요. 전 공간을 빛으로 옷을 입히는 게 아니라 호흡이라는 행위를 통해 개념으로 접근해요. 제게 빛은 정신적 실재를 일루전화 하는 개념적 도구라 할 수 있어요. 빛의 움직임이 오브제-조각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정신적인 비주얼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거든요. 기존에 제가 느끼던 딱딱한 조각을 유동적으로 자유롭게, 제 감성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거죠. 그래서 새로운 유형의 조각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아이러니 한 것이 전시가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요. 텅 빈 흰 벽만 남게 되거든요. 빛이 사라지고 나니까 아무것도 없이 조용히 모든 게 사라지더라고요. 그런 지점도 매력이 있어요.
# 공간을 호흡한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나요? 그 행위는 어떤 형식으로 전개되고 확장하나요?
처음에 작업 할 때는 ‘나의 호흡은 이런 거야’라고 딱 알지 못했어요. 처음엔 본능에 이끌려 한 거죠. 저 개인의 호흡이 첫 출발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사적인 호흡이겠죠.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무언가를 제시해야겠는데 고민 끝에 보니 그 대상이 ‘나’더라고요. 그 존재함이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요. 그러고 나서 하얀 벽을 숨 쉬게 하면서 저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죠. “텅 빈 큐브 안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아닌 내가 숨 쉬고 있더라.”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런 경험을 공감하지 않을까요? 숨 쉰다는 건 존재자가 공간 안에 투영되는 것이기도 하고, 관찰자가 공간을 정신적으로 더듬어 가는 행위이기도 하죠. 감각적이고, 촉감적이고요.
공간을 이동하면서 유사한 반복을 했어요. 그런데 문득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지?” 의구심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다시 묻게 되었어요. “벽이 뭐지? 내가 숨 쉰다는 행위가 저들에겐 어떤 의미일까? 내가 하는 일이 생산적인 일일까? 저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무언가를 불러일으키는 가치가 있을까?” 그러면서 차츰 시선을 타인으로 옮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사회를 보게 되더라고요. 현재뿐만 아니라 흘러간 시간을 보게 되고, 나의 역사뿐만 아니라 흘러간 사회적 역사를 보게 되고요. 내방, 스튜디오에서 화이트 큐브로, 더 나아가 누군가의 사적 공간, 공적 장소, 역사적 장소로 나아가게 되었죠. 텅 빈 공간에서 장소로 확장한 것이죠. 하지만 그 장소들도 제겐 ‘텅 빈 공간’으로 다가오긴 마찬가지에요. 저와 개인적 서사가 얽혀 있지 않은 공간들이거든요. 때론 생뚱맞은 공간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여기는 어떤 공간이지? 어떤 이야기가 있었지?’ 찾아보면서 자연스럽게 그 공간이 머금은 지나간 흔적과 이야기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죠. 그 과정에서 공간의 장소성이 서서히 드러나죠. 나와 관계를 맺어가면서요.
# ‘공간-장소’가 선택되는 기준은 무언가요?
첫 직관이죠. 벽과 천장으로 구획된 ‘공간’을 가면, 그 공간만이 갖는 기운이 있어요. 결국 그걸 선택해요. 구조를 차근차근 훑어가면서 대화가 이루어지고 소통이 이루어지는 느낌이 들죠. 마치 그 공간에서 생명 같은 것을 찾는 것 같아요. 공간을 체감하면서 어떤 상황을 추리해 보는 버릇이 있어요. 똑같은 벽과 바닥이 있는 공간들임에도 불구하고 기운이 다른 것은 거기에 있었던 누군가의 시간과 경험이 다 다르기 때문이고, 그래서 내가 느끼는 직관도 다 다르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러다 보면 그 공간이 과거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찾아보게 되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어떤 추상적 감정의 원인을 실증적으로 추적해 들어가게 되죠. 그런 공간은 그 동안의 사연도 많고, 굉장히 얽힌 이야기가 많아요. 어쩌면 저를 당기는 그 기운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순 없지만 필연적인 거죠. 그렇다고 저는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장소 특정적 작업’은 아니에요. 장소 특정적 공간은 장소가 지시적인데, 저는 그것을 반대해요. 제가 이야기하는 공간은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이에요.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소통을 하고 그 교감을 무용수들의 퍼포먼스로 가시화 하는 거고요.
첫 ‘공간-장소’작업은 구서울역에서 수장 창고라는 버려진 공간을 선택했죠. 제 전시 이후 지금은 RTO라는 공연장으로 탈바꿈되어 운영되고 있어요. 처음 그 공간 안에 들어갔을 때 벽에 녹아 있는 시간의 흔적과 물질적 감각들이 굉장히 강한 비주얼로 다가왔어요. 전 이런걸 ‘마티에르’라고 불러요. 시각적으로 촉각적으로 저를 끊임없이 자극하죠. 결국 그 강렬함으로 텅 빈 그 창고에 전시를 해야겠다는 결단까지 내렸어요.
그 다음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을 수감한 서대문 형무소에서 작업했는데, 장소 전체가 너무 가슴 아픈 곳이죠. 저를 이끈 공간은 칸칸이 있는 형무소 건물 안 보다 외부에 있는 부채꼴 벽 구조의 ‘격벽 장’이었어요. 미로같이 독특한 공간이다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수감자를 운동시키면서 감시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자유-감금’ ‘건강-죽음’ ‘자율-통제’ 무언가 모순된 욕망이 복잡하게 얽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장소였죠.
대만 단수이 지역에서 우연히 마주한 조그맣고 하얀 무역상인들의 숙소도 매력적이었죠. 영국식 근대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인데, 다른 유럽 양식이 느껴지기도 하면서 아시아적 느낌도 있고, 지붕은 기와로 되어있더라고요. 찾아보니 제가 방문한 단수이 지역은 스페인, 네덜란드, 일본, 중국에 지배된 역사를 갖은 항구도시였더라고요. 지역의 시대적 역사가 건축물 하나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죠. 더욱이 한 때 없어질 뻔 했지만 학자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상태에요. 공간이란 그렇게 세월과 사건들이 고스란히 흔적으로 녹아 있는 것이죠.
# ‘공간-격벽 장’ 작업들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서대문 형무소의 격벽 장은 수감자들을 한 사람씩 운동 시킨 공간이에요. 붉은 벽돌로 높이 쌓아 올린 좁고 긴 공간을 만들어서 수감자는 벽만 보며 그 안을 왔다 갔다 해야 하죠. 감시자는 그 위에서 모든 걸 바라볼 수 있게 판옵티콘(panopticon) 구조로 설계했어요. 형무소에 가두어 고문하면서 생명을 연장시키고, 운동의 자유를 주면서 모든 것을 감시하는 행태들이 모순되고 긴장된 상황으로 인식되었죠. 그 안에서 벽만 바라보고 달려야 한 수감자의 심리는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공간을 배경으로 퍼포먼스를 기획했죠. 안무가와 퍼포먼스 시나리오를 이야기를 할 때, “당신이 수감자다. 살려고 운동을 한다. 그런데 당신을 감시하는 누군가가 있다. 당신은 살수도 죽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고 가정하고 들어갔죠. 촬영에는 감시받는-시선과 감시하는-시선의 긴장관계에 중점을 뒀는데 이는 자유를 갈구하는 자와 통제하고자 하는 자의 긴장 관계이기도 하죠.
<시나리오_삶과 죽음의 미네르바Ⅰ>는 두 수감자가 된 안무가가 퍼포먼스를 한 실제 공간과 이 공간을 똑같이 데칼코마니처럼 만들어서 안무가의 움직임에 따라 벽이 움직이는 가상공간으로 구성되었죠. 즉 수감자의 호흡에 따라 벽이 숨 쉬는 거죠. 두 영상을 같이 설치해서 마치 서대문 형무소의 격벽장이 쭉 펼쳐지고 그 이야기와 역사까지 체감되게끔 전시장을 조성했죠. <통곡의 미루나무>는 서대문 형무소 앞에 굉장히 큰 ‘통곡의 나무’를 소재로 한 거예요. 사형당하는 모든 것을 이 나무는 목격했기 때문에 굉장히 특별한 나무로 기념하더라고요. 이 역사적 공간에서 받은 굉장히 실질적은 아픔을 표현하기 위해 이 나무를 상징적으로 다루었어요. 수많은 세월동안의 극단적 고통을 상징적 절단과 시간의 콜라주로 표현 한 거죠. 일종에 위안의 의식을 치러준 거예요. 이 프로젝트는 공간을 통해 역사적 풍경과 아픔을 제 나름대로 재구성해 본 것이었죠.
#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시나요?
처음에 공간을 움직이고 싶어서 호흡을 시작했고, 내가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를 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다양한 공간-장소들을 펼쳐 보였죠. 그런데 요즘은 하나의 고정된 집을 짓는 것 보다는 언제든 허물 수 있고 다시 지을 수 있는 융통성 유동성이 중요한 거 같아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동안의 작업을 보니 ‘벽’의 의미가 하나의 유동적인 ‘막’과 유사한 것 같더라고요. 장소의 경험들이 새로운 차원의 벽과 공간을 만들게 했지만 공간의 본질은 매우 복합적이고 유동적이라 절대적일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럼 결국은 시간성과 개별성을 갖은 추상적 이미지의 ‘막’에 가까운 거죠.
늘 지나간 누군가의 흔적은 벽의 본질을 떠올리게 만들죠. 영상으로, 이미지로. 그것은 그 구체적인 존재들과 같이 호흡하는 저만의 ‘막’일수 있고요. 최근에는 ‘벽’을 조금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어요. 사운드로 연상시킨다거나, 기억을 담은 필름의 움직임을 벽과 연동한다거나, 벽이나 사물의 물질감을 표층적 이미지로 바꾸는 영상을 제작하기도 하고요. 공간들을 유랑하듯이 좀 더 자유로워졌죠. 어쩌면 이러한 변화는 이 세상을, 제 앞에 펼쳐진 풍경과 장소들을 더 깊고 넓게 호흡하기 위함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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