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각인된 시간
“상상력에 의해 파악된 공간은 기하학자의 측정과 숙고에 내맡겨지는 무관한 공간으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 공간을 우리들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의 실제성에서 사는 게 아니라 우리들 상상력의 모든 편파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거의 언제나 우리들을 매혹한다.”
오랜 시간 한 공간 안에 있다 보면 벽이나 문이 움직이는 착시를 종종 느끼곤 한다. 그것은 착시일 수도 있고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의 욕망이나 상상의 구현일 수도 있다. 작가 금민정의 초기 영상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숨 쉬는’ 문과 벽은 작가의 경험이나 상상에서 처음 비롯되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몸이 자리한 익숙한 공간이 어느 순간 답답하게 느껴져 자신과 하나 되어 숨 쉬기 원했을 것이고 또 다른 경우에는 공간의 한 구석이 밝게 빛나거나 방 안의 수직수평이 어긋나는 경험과 상상을 했을 것이다. 금민정의 작업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크고 작은 변화를 보여 왔다. 그러나 그 핵심적인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출발선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2000년대 중엽부터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구현하여 만든 삼차원 공간의 이미지를 일반적인 싱글채널 비디오처럼 완결된 작품으로 모니터나 패널에 상영하지 않고 실제 공간에 투사함으로써 관객에게도 유사한 착시를 경험하게 하고 저마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도록 유도하는 작업을 주로 선보여 왔다. 관객이 경험하는 지금 그 공간은 그 안에서 작가가 보낸 시간이 새겨진 공간으로 이전과는 다른 공간이며, 사람들은 영상이 투사되는 동안 숨을 쉬고 움직이는 그 공간을 저마다 다르게 살게 된다. 그것을 ‘지각의 현상학’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조각을 전공한 작가가 고정된 물질적 오브제로서 조각이 지닌 한계를 일종의 확장된 입체로서 삼차원의 공간으로 치환하여 빛의 움직임과 소리를 통해 한시적이나마 생명을 부여하고 유동적인 입체로 만들고자 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유동적 입체’로서 다양한 작가의 시도들이 있었다. 반고체 상태로 바닥과 벽 사이에 끼어있는 흐물흐물한 문 모양의 조각과 그와 연결된 벽면의 줄무늬 패턴이 어느 순간 나선형으로 움직이는 모니터와 함께 놓인 〈유연한 방〉(2007)이나 좌대 위 모니터 안에 정지된 화면처럼 보이는 정물화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물들의 크기나 형태를 달리 하며 움직이는 〈유연한 정물〉(2007)과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최근까지도 작가는 영상이미지와 조각오브제를 결합한 일종의 비디오 조각(video sculpture)을 다양하게 선보이고 있다. 다만 초기에는 합성수지 같은 재료를 사용하여 전통적인 조각의 형태에 이미지를 더 하는 형식에 가까웠다면,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돌, 나무기둥, 나뭇가지, 철골, 거울 등 영상의 내용과 관련된 재료를 선택해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하나의 작품으로 보이도록 하는 형태로 진화하였다. 그 결과 작가의 비디오 조각은 고유한 물성을 가진 사물과 그와 어우러진 모니터 안의 움직이는 이미지가 하나로 결합되어 그야말로 정중동(靜中動)의 상태를 구현하게 되었다.
금민정의 비디오 설치(video installation)는 이러한 비디오 조각이 일종의 입방체이자 유사한 유동적 입체인 공간으로 확장된 형태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작가가 평소 주로 시간을 보내는 집과 작업실 공간의 이미지를 3D 그래픽으로 변형해 전시장 공간에 투사하는 방식이었으나, 차차 전시를 위해 주어진 공간에서 충분히 교감하고 시간을 보낸 뒤 본인의 직관에 따라 변형한 이미지를 해당 공간에 다시 투사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동일한 작품이 다른 공간에서 전시되거나 다른 공간에서 촬영한 이미지로 작업하는 경우에도 상영되는 공간의 성격에 맞게 조절하는 것에 가장 큰 강조점을 두었다. 영상 이미지 자체가 아닌 그 이미지가 투사되어 변화시키는 공간과 작가 본인을 포함해 그 안에서 변화된 공간을 경험하는 사람들의 지각의 변화에 중점을 둔 것이다. 이를 위해 사운드는 물론 적절한 오브제와 공간의 질감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고려되었고 그 결과 관객 역시 단순히 시각적인 감상이 아닌 청각과 촉각을 포함해 공감감적으로 공간을 경험하게 되었다.
작가는 이후 대만, 호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방문하거나 일반적인 전시 공간이 아닌 곳에서의 작업을 진행하면서 자신이 공간과 맺는 관계성에 보다 주력하였다. 흰 벽으로 둘러싸인 육면체의 중립적 공간에서 구체적인 장소성이 부각되는 특정한 공간으로 중심이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서대문형무소의 격벽장이나 대만 단수이의 세관원 숙소처럼 근대의 식민주의 역사의 흔적이 남은 장소들이거나 문화역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문화비축기지 등과 같이 현재는 문화공간이지만 예전에는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던 장소들이다. 작가는 과거에 누군가 남긴 물리적 흔적이 켜켜이 쌓여 역사와 개인의 경험이 공존하는 공간에 본인의 직관과 상상을 토대로 제작한 영상 이미지를 투사하고 때로는 그와 관련된 오브제를 함께 설치하거나 안무가의 퍼포먼스를 시도하였다. 그렇게 해당 공간에 작가의 흔적이 추가되고 전시를 보러 들른 관객들의 흔적이 축적된다. 그 흔적들은 때로는 가시적인 것일 수도 있고, 더 많은 경우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공간이 간직한 기억으로 과거 언젠가 시작되어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게 될 시간의 흐름이 공간에 각인되는 과정을 의미할 것이다. 어느 시점 이후 작가가 현대무용가의 안무를 영상 안과 밖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것이나 사운드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시도한 것 역시 유사한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단순히 작품의 미학적 차원을 넘어 특정한 장소에 대한 또 다른 창작자의 해석을 개입시키고 그 공간과 맺는 개별자의 관계를 보다 확장하기 위한 의도에서 말이다.
장소성이 두드러진 작가의 다층적인 비디오설치 중 비교적 최근 있었던 국립현대미술관과 문화비축기지 전시는 작가의 고유한 특징과 앞으로의 방향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두 장소 모두 1970년대 군부독재 시절 지어진 보안 시설로 각각 국군기무사령부와 석유비축기지로 사용되다가 2000년대에 새롭게 문화시설로 용도가 변경된 곳이다. 이들 전시에서 작가는 기존의 3D 애니메이션 기법뿐 아니라 해당 공간의 안팎에서 채집한 움직임과 소리를 영상이 투사될 벽의 좌표에 맵핑하여 벽 자체의 움직임을 만들거나 아카이빙된 과거 영상에서 가져온 건물과 현재의 건물을 병합하여 하나의 화면으로 만드는 등 보다 적극적인 제작 방식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사람 신장의 몇 배에 달하는 대형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하고 생생한 사운드를 보강하여 관객의 지각 경험과 상상력을 보다 자극하였다. 전시장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 공간의 외부 모습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져 온 여러 양상과 마주하고 자신이 서있는 바로 그 공간의 기둥이 증식되어 움직이는 것과 같은 가상의 이미지를 경험하면서 지각의 혼돈을 느끼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 시간만큼은 전혀 다른 시공간을 경험하게 되는 셈이다.
이처럼 금민정의 작업은 단순히 특정한 공간 안에 영상을 설치한다는 의미의 장소-특정적 비디오 설치로 규정하기에 부족함이 있다. 작가 자신이 맞닥뜨린 다양한 장소에서 매번 그 공간과 교감하는 현상학적 경험을 토대로 상상력을 더해 만든 비디오 설치는 해당 공간을 변화시키고 작가의 작품으로 인해 달라진 공간 안에서 관객의 경험 역시 저마다 매번 달라진다. 어쩌면 그녀의 ‘숨 쉬는 벽’은 본인의 작품이 상영되는 공간이 관객 각자의 지각의 역사와 경험에 따라 달리 ‘사는 공간’으로 제시되기 원하는 ‘유연함’에 대한 상징이자 은유일지 모른다. 앞으로도 작가는 계속하여 자신이 원하는 느낌과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잘 드러낼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우리 앞에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꾸어 내보일 것이다. 그녀는 바슐라르가 말하는 “장소애호가(topophilie)”이며, 그 이전에 지각이란 나의 신체가 “역사적 두께를 가지고 지각적 전통을 인수하며 현재와 대면”하는 것임을 잊지 않는 자이다. 꾸준히 자신의 길을 걷는 한 작가의 작업이 변화하는 과정을 십 여 년 이상 지켜보는 일은 귀하고 또 즐겁다. 금민정의 지각의 현상학과 상상력이 계속하여 우리를 ‘매혹적인’ 공간으로 이끌기를 바라며 앞으로의 십 년을 또 기대해본다.
신혜영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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